<네이버웹마스터도구> <구글 서치콘솔> 바로크의 대가 젠틸레스키를 아시나요?<우리의 첫 미술사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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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의 대가 젠틸레스키를 아시나요?<우리의 첫 미술사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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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미술사 수업> 읽다 바로크 시대의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매력에 빠져 그녀와 관련된 내용을 책을 참고하며 요약, 정리해서 올려봅니다. 젠틸레스키는 누구이며 그녀의 작품이 어떤 차별성이 있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의 첫 미술사 수업> 강주은 지음

 

1.      젠틸레스키는 누구인가?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의 화가로, 피렌체 피세뇨 아카데미 최초의 여성회원이었습니다. 1593년에 태어나 1653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자화상>

아버지는 화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다. 오라치오는 아르테미시아가 어릴 때부터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집중적으로 그림 교육을 시켰으며 딸의 그림에 대한 칭찬을 침이 마르도록 했다고 합니다.

19세에 아버지의 친구이자 그녀의 미술 스승이었던 아고스티노 타시(1578~1644)에게 성폭행을  당해 이를 고발했으나 재판 과정에서 손가락 고문과 산부인과 검사 등 2차 가해를 당한 사건이 있으며, 이 과정에서 느꼈던 치욕과 오명이  그녀의 작품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신화와 전설을 주제로 그림을 주로 그렸습니다. 그녀의 대표작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딧>, <수산나와 두 장로>, <자화상> 등이 있습니다.

2.      그럼 <유딧과 하녀, 홀로페르네스의 목> 작품을 다른 작가들과 비교해 살펴보겠습니다.

 

스토리를 이해하면 그림의 이해가 빠르죠. 그래서 유딧과 관련된 이야기를 먼저 소개할께요.

 

구약성서의 유딧서에 따르면, 이교도인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가 대군을 이끌고 유다 왕국의 한 마을을 침공합니다. 당시 마을에는 성인 남성들이 모두 전쟁에 나가고 여자와 노약자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주민들이 몰살당할 위험에 놓이게 된 것이지요. 이때 남편을 잃은 여인 유딧이 나서 한밤중에 술을 들고 적장인 홀로페르네스의 막사로 찾아갑니다. 그녀는 술에 취해 잠든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잘라 유대 민족을 구해냅니다.
(p.156 발췌)

 

스토리를 보면 유딧은 유대민족의 영웅입니다. 몰래 막사에 들어가 적장의 목을 베고 상황을 수습하는 긴박한 상황이 상상되지 않나요?

먼저 젠틸레스키의 <유딧과 하녀, 홀로페르네스의 목>그림을 보시죠

세 개의 작품을 보시죠. 옷매무새는 흐트러져 있지만, 관능성이나 여성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몰두하는 집중력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표정에서도 결연함이 묻어나지요. 유대 민족을 구하기 위한 영웅적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여성 인물들의 연대감도 돋보입니다. 함께 등장하는 하녀를 관찰자가 아닌 적극 조력자로 그려냅니다. 유딧과 하녀는 관람자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신들의 일에 몰입하죠.

 

유딧과 하녀의 시선처리는 관람자들로 하여금 실제 사건을 목격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합니다. 두 여성이 한 공간에서 한 몸처럼 움직이며 긴박한 상황을 절묘하게 표현했지요. 젠틸레스키는 여성들이 서로 끈끈하게 조력하고 연대하는 상황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음은 카라바조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 보시죠. 카라바조의 유딧은 아름답고 연약한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적장을 살해하면서 망설이고 주저하는 모습이지요. 마치 원치 않는 살해를 하는 여성처럼 보입니다. 

 

아버지 오라초 젠틸레스키의 <유딧과 하녀>입니다. 적장의 목은 베었지만 하녀와 엇갈린 시선처리,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표정에서도 민족을 구한다는 결연함을 엿볼 수 없습니다. 

다음은 얀 마시스의 <유딧>입니다. 유딧의 손에 적장의 목이 들려 있습니다. 그런데 표정이 지나치게 평온해서 오히려 어색하게 보입니다. 또 지나친 노출로 관능적 요소를 가미했습니다. 마시스는 유딧을 적장을 무찌른 영웅이 아니라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관능적인 여성으로 묘사했지요.

루카스 크라나흐의 <유딧>을 보겠습니다. 유딧이 적장의 목과 칼을 들고 있지만 표정에서 마시스와 마찬가지도 결연함이나 긴장감을 엿볼 수 없습니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유딧과 홀로페르네스의 >의 작품은 극적으로 표현된 명암의 대비로 다소 역동적인 모습이 표현되었지만 유딧의 표정을 보면 역시 결연함이나 긴박감은 엿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가슴을 관능적으로 드러내고 눈을 매섭게 치켜뜬 것이 다른 의도로 읽힙니다. 

프란츠 슈튜크의 <유딧과 홀로페르네스>는 유딧을 민족을 구한 영웅은커녕 팜므파탈로 표현했습니다. 완전한 누드로 관능성을 강조했고, 긴 칼을 들고 매서운 눈으로 적장을 내려다보는 자세는 유딧의 파괴성을 반영한 것입니다. 즉 유딧을 잠들어 있는 남성을 죽일 수 있는 파괴적인 여성으로만 요사한 것입니다. 

구스타프 클림프의 <유딧<유딧 1>도 보겠습니다. 유딧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안고 도취된 표정으로 관객을 응시합니다. 옷이 풀어헤쳐져 가슴을 드러낸 자세는 관능성을 나타냅니다. 잘린 목을 들고 도취된 표정을 짓는 유딧의 몽환적 눈빛을 일부 학자들은 시신이나 유골에 애착을 보이는 도착증세인 '네크로필리아' 즉 시체 성애라고 설명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한 주제를 가지고 여러 작가들이 표현한 작품을 만나보셨는데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그리고 젠틸레스키가 왜 바로크의 대가로 제가 흠뻑 매력에 빠졌는지 이해하셨나요?

젠틸레스키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포스팅을 했습니다.

 

그녀의 다른 작품들도 곧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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