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웹마스터도구> <구글 서치콘솔> 클로드 모네의 혼이 담긴 정원 <지베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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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클로드 모네의 혼이 담긴 정원 <지베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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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가 혼신의 힘을 다해 가꾸고, 작품 활동의 모티브가 된 모네의 정원 '지베르니'를 통해 모네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스카 클로드 모네(1840-1926).

클로드 모네

그는 파리를 떠나 시골 마을 아르장퇴유(1817), 푸아시, 베퇴유를 거쳐 지베르니(1883)에서 29년의 정원생활과 함께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다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어찌 보면 지베르니는 모네가 세상에 남겨준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베르니 '물의 정원' 5월에 가니 일본식 다리 위에 보라색 아카시아가 가득 피어있어요

 
인상파 화가들은 바깥에서 작품 활동을 많이 해서인지  시력에 문제가 생긴 경우가 많은데 모네도 그랬습니다. 백내장으로 두 번의 수술을 받았고, 수술 후 황시증(사물이 노랗게 보이는 현상)을 앓기도 했습니다. 
 
모네는 “자기 그림 이해하려면 백 마디 설명보다 자신이 직접 가꾼 정원을 보는 게 낫다.”라고 말할 정도로 정원 꾸미기에 진심이었으며 정성을 쏟아 가꾼 지베르니의 곳곳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그는 "나는 꽃 덕분에 화가가 되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꽃과 식물을 사랑했습니다. 
파리에서는 엄격하고 무뚝뚝한 모네가 지베르니에만 가면 온화하고 열정적으로 변했다고 하니 꽃을 정말 사랑한 것이 맞나 봅니다.
 
모네는 자신 작품의 아름다움과 명료함을 온전히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 바로 자신의 정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베르니 정원의 모네 집

모네에게 정원이란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움을 겪는 동안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안식처 같은 곳이었습니다.  식물을 가꾸고 그림을 그리고 자연과 예술에 대한 애정을 조화시킬 수 있는 피난처이기도 했습니다. 
 
모네는 정원을 가꾸며 작품 세계도 함께 발전했습니다.
모네는 생애 후반부에 왕성하게 활동을 했습니다. 정원에서만 예술적 영감을 찾을 수 있다며 수시로 정원에 나가 빛과 날씨의 변화를 관찰하고, 하루종일 정원에서 이젤을 펴놓고 그림에 전념했습니다. 봄이면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여름이면 지칠 때까지 그리고 겨울이면 그동안 완벽하한 탐구를 위해 수집해온 시각 정보를 더듬어가며 작품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일본식 다리

 
1870년 모네는 카미유 레오니 동시외와 결혼하고, 1867년 장남 장이 태어났습니다.  카미유가 모델 출신이라는 이유로 모네의 가족은 결혼을 반대했지만, 모네는 이를 무릅쓰고 카미유와 결혼했습니다.
 

카미유 동시외

인상파의 탄생이 된 작품은 바로 <인상:해돋이>입니다. 1872년 작품으로 제1회 '무명 예술가 협회전'에 출품한 후 대충 무성의하게 그렸다는 혹평을 받았습니다. 이 그림은 영국의 윌리엄 터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림입니다. 대충 무성의하게 그렸다는 혹평을 받았지만 인상파의 태동을 알리는 그림이 되었지요.
 

인상:해돋이
윌리암 터너의 안개속의 해돋이

1876년 모네는 백화점 소유주 에르네스트 오슈데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습니다. 오슈데의 아내 알리스는 훗날 모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됩니다. 
후원자인 오슈 데는 사치스러운 생활로 결국 파산하게 되고, 모네의 수입도 덩달아 급감하게 됩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카미유의 건강까지 악화됩니다. 1878년 카미유는 둘째 미셸을 낳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네는 사랑하는 카미유를 떠나보내며 그녀의 임종 순간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카미유의 임종

카미유가 세상을 뜨고 오슈데는 사업 도모차 파리로 떠나고, 알리스는 모네 옆에서 실질적인 도움과 함께 정서적으로도 많은 지원을 했습니다. 

알리스

경제적으로 어려운 모네는 푸아시로 이주했지만 산업화와 늘어나는 인구로 이곳에서도 정을 붙이지 못하고 다시 자신의 여생을 함께하게 될 지베르니로 이주합니다.

산업화의 상징인 증기기관차. 모네가 그린 생라자르역

1890년 2 2 프랑에 지베르니의 집과 뜰을 샀습니다. 지베르니는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70킬로 정도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로 처음 이주하여 모네와 알리스의 가족은 총동원되어정원을 가꾸기 시작합니다. 정원이 마음에 드는 모습을 갖출 때까지 모네는 그림 그릴 장소를 찾아 여행을 했습니다.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에는  튤립 구근을 재배하는 기술을 터득해, 자기 정원을 가꾸는데 적용하기도 했습니다.
 
모네는 사실적 묘사보다 시각적 느낌을 표현하는데 더 치중한 작가입니다.  모네는 연작을 많이 한 대표적 작가인데요, 그의 루앙 대성당이나 수련, 일본식 다리 등이 그렇습니다. 

루앙대성당

모네에게 지베르니는 힘과 회복의 원천이었습니다.
1892년 오슈데가 죽은 지 1년 후 알리스와 모네는 결혼합니다. 알리스는 모네 옆에서 충실한 동반자이자 조언자, 매니저 등의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또한 지베르니의 집안 인테리어는 알리스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어 꾸며진 것이라고 합니다. 

지베르니 모네 집 주방모습

모네는 상상속 자연을 반영하여 오랜 시간 공들여 지베르니를 변화시켰고 마침내 정원이 그의 작품 세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모네는 자신의 정원을 가꾸기 위해 미학 서적보다 더 많은 원예 서적을 읽었고, 근처에 연못이 있는 땅을 추가로 구입해 물의 정원을 꾸몄습니다.

지베르니 물의 정원

 
강의 물길을 바꾸어 물이 연못으로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게 하는 수로를 건설하기 위해 시에 수로 변경을 신청했으나 마을 주민들이 백합 등 이국식물이 강을 오염시킬까 봐 걱정해 신청이 거부되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밤에는 연못물의 순환을 제한하겠다고 타협안 제시해 결국 허가 받아냈습니다.
 
물의 정월을 꾸미면서 그곳에 일본식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모네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요. 당시 우키요에가  인기를 끌고 있었지요. 지베르니 모네 집에는 모네가 직접 수집한 일본 판화 작품이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물의 정원에 있는 다리도 아마 당시 프랑스로 전해진 판화 작품에서 본 다리일 것입니다. 게다가 모네는 카미유에게 일본 옷을 입게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우키요에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큰 파도))
지베르니 모네 집에 걸려있는 모네가 수집한 일본 판화 작품

https://grim-grim-like.tistory.com/9

'우키요에'뭐예요?

지난 포스팅에서 모네가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을 했는데요, 오늘은 우키요에가 무엇인지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키요에(Ukiyo-e, Ukiyoe , 浮世絵(부세회)) 는 한자 의미를 그대로

grim-grim-like.tistory.com

일본 의상을 입은 카미유

1901년 모네는 연못의 면적을 세배로 늘리고, 다리도 추가로 건설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연못에 수련을 심고 물의 정원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합니다.
 

수련

'1897년 모네가 처음 수련을 그리려고 시도했을 때는 대상을 수련에 한정했고 절제된 색조로 표현된 수련잎이나 물과 대비를 이루며 밝은 색채를 터뜨리는 꼿의 효과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새 작품에서는 연못 전체를 조망하며서 물에 떠 있는 대상의 형태를 전체의 일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연못과 못가의 경계를 이루는 나무와 나뭇잎,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이 물에 비친 모습과 항상 움직이는 수련을 묘사하는 것은 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작업이기 때문에 모네는 이에 더 강한 흥미를 느꼈습니다.' (모네가 사랑한 정원 - 데브라 맨코프 112쪽)
 
“나는 빛과 반사에 심취했다결국 그것 때문에 시력이 망가졌지만 말이다.”
야외에서 그림을 많이 그리는 인상파 화가들이 시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모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912년 모네는 백내장 진단을 받았습니다. 의사로부터 수술을 권유받았지만 혹시라도 시력을 잃을까 봐 미루며 작품활동을 하다 결국 세 번의 백내장 수술을 받았으나 황시증과 청시증 등의 후유증을 겪으며 “차라리 장님이 되어 예전에 항상 보던 아름다움을 기억하는  낫다”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시력이 망가진 후 모네가 그린 물의 정원에 있는 일본식 다리

 
알리사의 죽음, 백내장 진단, 1차 세계대전 발발, 신경 쇠약을 앓던 장남 쟝의 사망, 둘째 아들 미셸과 장 피에르 오슈데(의붓아들)의 전쟁 동원 등 모네는 심적으로 많은 어려움과 침체기를 거치면서 다시 작업을 시작하고는 자신의 두 번째 수련 작품을 국가에 기증하기로 합니다.  
 
기증 조건으로 두 가지를 제시했는데,  흰색 벽에 수련 작품만 걸어달라는 것과 자연광이 들어오는 곳에 전시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오랑주리 미술관의 길고 좁은 타원형 방 두 개에 전시하기로 하고 마지막 작품활동에 매진합니다. 그러나 모네는 자신의 그림이 오랑주리에 전시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26년에 사망합니다.

오랑주리 미술관의 수련 연작

 
모네 사망하고 지베르니는 아들 미셸이 물려받았으나, 의붓딸불량슈가 1947년 죽을 때까지 정원사 한 명과함께 지베르니를 지키고 가꾸며 죽을 때까지 살았습니다. 
블랑슈가 죽고 나서 정원은 방치되었고, 1960년 미셸이 차사고로 사망하자, 이 부지는 프랑스 정부 소유가 되었으나 집과 정원은 심각하게 황폐화되었습니다. 그 후, 각계각층 인사들의 노력을 통해 20년에 걸쳐 복원해 1980년 9월 대중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지금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지베르니는 사랑받는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지베르니 마을

그래도 모네는 행복한 화가였습니다. 죽은 후에 이름을 알리는 화가도 있고, 죽어서도 무명의 화가로 잊히는 화가도 많은데 모네는 살아생전에 유명세를 탔고, 오래도록 살면서 많은 작품을 통해 많은 사랑도 받았으니 화가로서는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되네요. 

참고서적 :&amp;amp;nbsp; 데브라 맨코프의 '모네가 사랑한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