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3대 '사과'하면 뉴턴의 사과, 세잔의 사과, 애플의 사과라고 하는 우스개 소리가 있는데, 서양 회화를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사과가 등장했습니다.
서양 미술에서 사과와 관련된 이야기를 강홍구 작가님의 <그림 속으로 난 길>을 통해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서양의 역사와 문화에는 다양한 사과가 등장하는데요, 성서의 선악과, 파리스의 사과, 뉴턴의 사과, 백설공주의 사과 등등 많은 사과가 등장합니다. 이렇게 사과가 서양의 문화 전반에 걸쳐 출몰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서양에서는 사과가 '성(性)'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과는 사랑의 상징이며 결혼 의식의 제의적 상징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서양의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사과는 성서의 사과와 파리스의 심판에 등장하는 사과입니다. 그러나 이들 사과는 그림의 일부로서 등장하는 것이지 중요한 모티브는 아닙니다.
비너스와 황금사과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파리스의 심판'을 알아야겠죠.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신들은 결혼 축하연에 초대받았는데 불화의 여신인 에리스는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화가 난 에리스는 황금 사과 하나를 결혼식장에 던졌습니다. 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비너스) 세 여신들 사이에 서로 황금 사과를 갖기 위한 다툼이 일었습니다. 이에 제우스는 그 심판을 파리스에게 맡겼습니다. 세 여신은 이데산으로 달려가 아테나는 지혜를, 헤라는 세계의 주권을, 아프로디테는 인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각각 약속하였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를 택하였고, 이에 따라 황금 사과는 비너스의 차지가 된 것이지요.
그래서 비너스 옆에는 황금 사과가 자주 등장합니다.
성서와 관련된 그림에서도 사과는 주된 모티브가 아니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은 주로 신화나 역사, 성서를 주제로 하기 때문에 그림 속 배경으로 사과가 등장하는데요,
<프리마베라>는 비너스 등 그리스의 신들이 봄나들이를 나온 광경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 위쪽에 과일이 매달려있는데 자세한 묘사는 알아보기 힘들지요.
다음은 혼인의 성스러움을 묘사한 얀 반 에이크가 1434년에 그린 <아르놀피니 부부> 초상화입니다. 신랑 뒤쪽에 사과가 그려져 있는데요, 사과가 관찰력을 통해 자세히 표현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뒷 배경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자세하고 세밀하게 그려졌습니다. 창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인해 생기는 명암 처리, 어두운 부분의 반사광과 드림자 등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실 저는 이 그림을 보면서 한 번도 신랑 뒤쪽의 사과는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과'를 주제로 그림들을 관찰하다 보니 주목하게 되네요.ㅎㅎ
계속해서 뒤러가 1507년에 그린 <아담과 이브>를 보시겠습니다.
여기에도 사과가 등장합니다. 사과는 부드럽고 정밀하게 그려졌고 부피감과 질감도 잘 표현되었습니다. 어두운 배경 속에서 밝게 빛나는 붉은 사과의 표현이 정말 정교하게 그려졌네요.
다음은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다 간 바로크 시대의 화가 카라바조가 1596년 그린 <과일 바구니> 속 사과입니다.
드디어 성서나 신화이 배경이 아닌 정물로서 사과가 등장했습니다. 과일바구니 속에는 포도, 사과, 배 등이 먹음직스럽게 담겨있습니다. 사과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벌레 먹은 사과죠. 포도 잎사귀도 말라비틀어져 있습니다. 이는 카라바조가 '이상화된 과일'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과일을 그렸다는 것입니다.
카라바조는 "나는 사람을 그리는 정성과 똑같이 자연을 그린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림의 일부나 배경이 아닌 독립된 장르로서 정물화를 그렸습니다.
이제 바로크를 대표하는 거장인 파울 루벤스와 벨라스케스의 사과를 보겠습니다.
먼저 루벤스가 1628년에 그린 <아담과 이브>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뭔가 덜 그려진 사과입니다. 입체감은 잘 표현되었고 질감과 색채도 뛰어나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정밀함은 없지요. 그 이유는 르네상스 화가들의 그림은 '채색된 소묘', 즉 정확한 형태와 자세한 명암을 그려 넣은 소묘에 세심하게 채색을 했는데, 바로크 시대에는 그림이 훨씬 회화적이 됩니다. 즉 색채와 면 위주로 붓을 사용하여 세세한 묘사를 생략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담한 붓놀림과 풍부한 색채가 돋보입니다.
1634년 벨라스케스가 그린 <왕자 발타자르 카를로스와 난쟁이> 속의 사과는 몇 번의 붓 터치로 단숨에 그린 듯 보입니다. 섬세하게 그리지 않아도 사과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지요.
다음은 사실주의 화가로 알려진 쿠르베의 사과를 보겠습니다.
쿠르베는 르네상스 이래 이상화된 아름다움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파리 코뮌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베르사유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감옥에서 인물을 모델로 쓰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 친구들이 보내주는 과일이나 꽃을 열심히 그렸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1871년 감옥에서 그린 <정물>입니다.
쿠르베에 이르러 드디어 상상의 사과는 사라지고 실재하는 사과만 남게 되었습니다. 당시 화가들은 더 이상 파리스의 황금 사과나 성서의 선악과를 그리지 않게 된 것이죠. 그렸다 해도 그런 사과들은 더 이상 그림의 주류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사과'그림 하면 뭐니 뭐니 해도 세잔의 사과죠.
세잔의 사과에 대해 영국 출신 소설가이자 아마추어 화가였던 D. H. 로렌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잔은 사과를 그림의 중요한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세잔은 데생과 색채가 별개의 것이 아닌 채색을 함과 동시에 데생도 이루어지고, 색채가 풍부해지면 형태도 충실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사과는 색채가 밝고 단단하고 둥근 물체였기 때문에 세잔의 생각을 구현하는데 알맞은 소재였습니다.
세잔의 사과는 생생한 색채를 유지하면서도 단단한 존재감과 입체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사과는 어두운 부분도 생생하게 채색되어 있습니다. 그의 사과는 그 누구의 사과와도 다른 스스로 존재하는 충일한 존재감을 드러내 보입니다. 세잔의 사과는 후일 후배 작가들의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세잔 덕분에 독립을 이룬 사과는 다시 해체와 변신의 길에 접어듭니다.
입체주의자들은 형태를 해체하는 작업에 들어가죠.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앞쪽에 있는 사과를 보면 꼭지와 둥근 형태를 통해 사과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야수파 화가 앙리 마티스에 이르면 사과는 화면의 한 구성 요소가 됩니다. 사과는 더 이상 사과의 본질이나 겉모습과는 관계가 없이 화면에 포함되는 둥그런 형태와 화면이 요구하는 색을 갖게 됩니다. 사과의 모양과 색에 맞춰 화면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필요에 의해 사과가 변형되고 과장되는 것입니다.
그림에서 사과는 붉은 분위기의 그림에 악센트를 주는 역할밖에 하지 않습니다. 사과는 독립된 물체로 인식되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색과 형태 등 그림에 필요한 요소로 취급되는 것입니다.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오면 사과는 다시 한번 변형을 거칩니다. 바로 사과의 본질이나 외양, 존재감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과 연관되는 것이죠.
르네 마그리트의 <거대한 테이블>에 나오는 사과는 돌로 전치되어 있습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전치 혹은 데페이즈망(depaysement) 기법은 사물의 겉모습은 그대로이되 그것을 이루는 구성 요소를 바꿔 의식의 혼란과 놀라움을 주는 방법의 일종입니다. 사과는 먹을 수 있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도구 역할을 하죠. 이 사과는 사과가 아니라 배라고 해도 상관없으며 사람의 의식을 깨뜨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죠.
자, 이렇게 해서 강홍구 작가님의 <그림 속으로 난 길>을 통해 서양 회화에 나타나는 다양한 사과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매우 친근하고 흔한 '사과'가 그림 속에서 가지는 의미와 변천들을 보니 사과를 다시 보게 되네요. 덕분에 사물이 지니고 있는 본연의 모습이나 의미를 넘어서 그것이 시대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해석되고 변화하는지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먹고 만지는 사과는 더 이상 사과가 아닌 상징과 기호로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랍에서 꺼낸 미술관> (0) | 2023.06.02 |
---|---|
'뒤샹의 샘' 등을 통해 본 '오브제'란 무엇인가? feat. <원작 없는 그림들> (0) | 2023.05.05 |